서평나사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소설 『주홍글자』

이완****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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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호손 <주홍글자> / 동서문화사


사랑, 구원, 복수에 관하여




『주홍글자』를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가을, 어느 허름한 영화관이었다. <사랑과 영혼>의 주인공 데미무어가 출연한 작품이었다. 

 롤랑조페는 당시 어떤 영화보다 아름답고 찬란한 영상미를 앞세워 데미무어와 게리올드만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필름에 멋지게 담아냈다. 20살의 나는 영화 <주홍글자>를, 남성중심의 세계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데미무어의 사랑이야기 정도로 바라보았다.


25년이 지난 지금 나사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소설 『주홍글자』는 내게 헤스터 프린, 딤즈데일, 칠링워스라는 세 명의 주요인물을 중심으로 ‘사랑, 구원, 복수’에 대하여 각각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했다. 즉,


헤스터:     “사랑은 나의 것”

딤즈데일:    “구원은 나의 것”

칠링워스:     “복수는 나의 것”


마지막으로 <주홍글자>는 내게 묻는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드라마 <모래시계>의 대사처럼 그 다음이 중요한 것은 아닌가 하고.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이런저런 잘못을 한다. 나 역시 세상에 차마 고백하기 힘든 잘못들을 하며 살았다. 대부분 깊은 파도처럼 마음속에서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지만, 실제 실행에 옮긴 잘못된 행동들도 있었다. 그 때 나는 어떻게 했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헤스터 프린처럼 다 안고 갔는가? 딤즈데일처럼 자기구원 속으로 도피했는가? 찬찬히 되짚어 보면 딤즈데일처럼 도망이 많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잘못을 발견하고, 나의 삶을 스스로 파괴하면서까지 칠링워스처럼 나와 타인을 힘들게 한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다시 <주홍글자>를 생각해 본다.


1. 사랑은 나의 것 <헤스터>


 존경과 배려로 사랑을 정의한다면 헤스터는 딤즈데일을 정말 사랑했다. 

추측컨대, 헤스터는 칠링워스와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랑도 기약도 없는 남편 대신 젊고 멋진 목사 딤즈데일과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개인의 행복한 삶을 위한 선택의 측면에서 보면 그녀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된다. 

 다만, 헤스터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분명 부적절 했고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홍글자 A’로 대표되는 그 처벌이 너무 가혹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지, 헤스터와 딤즈데일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말할 수는 없을 것 이다.

  헤스터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려고 노력하였다. 그녀는 감옥에 갔고 주홍글자를 새겼으며 마을사람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수모를 겪었다. 딸 펄을 빼앗길 뻔도 했고 칠링워스에게 7년간 정신적인 괴롭힘을 당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죄를 나누지 않았고 온전히 자신이 책임졌던 여자. 자신보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해 죽을 때까지 봉사했던 성인. 자신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자 살아있는 주홍글자 펄을 아름답고 씩씩하게 키워낸 엄마. 헤스터는 세상의 그 어떤 죄인보다 아니 그 어떤 사람보다 사랑했고 봉사했으며 헌신했다. 나는 헤스터프린에게만큼은 그 어떤 비난도 하고 싶지 않다. 정말 멋지고 이상적인 인물이라 생각한다. 작가 스스로 그 이미지를 표현했듯 헤스터는 성자가 아닌가 싶다.

작가는 헤스터를 통해 아래의 인용문처럼, 우리의 사랑과 책임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p. 82. 

주홍 글자 덕분에 타인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하자 소름이 끼쳤지만,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세상과 자신에게서 도망가는 사랑하는 연인 딤즈데일에게 구원의 기회까지 제안한다.


p. 176.

하느님께는 자비심이 있습니다. 다만 당신에게 그것을 잡을만한 힘이 있느냐가 문제죠. 


  ‘힘’. . . 나는 그것을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딤즈데일은 결국 떠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함께 따라나서 방해하려 했던 칠링워스의 방해공작 보다는 딤즈데일이 지닌 인간 본연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장 일반적인 인간유형으로 보이는 딤즈데일을 되집어 보자.


2. 구원은 나의 것 딤즈데일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함으로써 죄 사함과 안도를 얻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죄를 세상에 고백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딤즈데일은 다음과 같이 변론한다.


p.121. 

 타고난 성질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 겁니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비록 죄는 지었지만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을 바라는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보니 자신의 추악하고 흉학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요? 그런 일을 해버리면 어떠한 선행도 하루 없게 되고, 전보다 더 열심히 선행을 한다 해도 과거의 죄를 속죄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치 흰 눈처럼 순결한 체하며 사람들 사이를 활보하는 것인데, 사실 그 마음속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죄악이 시커멓게 얼룩져 있지요. 


 이에 대해 칠링워스는, 그것은 치욕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는 자들의 변명이라 치부한다. 먼저 겸손한 태도로 죄를 회개하여 양심의 힘과 존재를 명백하게 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반론한다.

  딤즈데일은 분명 비밀은 간직하지만, 스스로 본인을 교활하고 양심의 가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위선자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비참한 자신의 모습이 미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존경받는 성직자로서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 미워하면서도 밝힐 수 없는 사람이 딤즈데일이고, 그로 인한 자책과 신경쇠약으로 결국 죽음에 이른 남자가 딤즈데일이다. 

 딤즈데일의 심적 고통과 결정에 측은지심이 들면서도, 내가 딤즈데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세상과 헤스터에게 변명과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p. 170.

난 틀렸소. 절망뿐이요!! ...(중략)... 내가 무신론자거나, 양심이 없거나, 거칠고 동물적인 본능으로 살아가는 야비한 남자였더라면 벌써 오래전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것이오. 아니 안정을 잃는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 내 영혼은 어떻소?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선량한 자질도, 하느님이 주신 천부적인 재능도, 모두 내 정신을 괴롭히는 형틀에 지나지 않소. 헤스터. 나보다 비참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거요!“ 


P.171

가슴에 주홍글자를 떳떳하게 달고 있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오! 내 주홍글자는 아무도 모르게 불타고 있소!


  정말 헤스터가 딤즈웨일보다 고통이 적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개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자 개인의 삶에서 측정하자면 본인의 힘겨움이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헤스터는 딤즈웨일이 겪었을 개인적인 내적 고통과 더불어 연인으로서, 엄마로서,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온전히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감내했다. 그 모든 고통을 이겨냈기에 주홍글자는 본문에 제시된 대로, 모욕과 비난이 아닌 두려움과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눈물겨운 상징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헤스터는 연인의 존재를 숨겨주었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칠링워스의  더 치명적인 독이 주입되고 있음을 깨닫고 딤즈웨일에게 고백한다. 출발부터 끝까지, 딤즈웨일에 대한 그녀의 존중과 배려가 읽혀지는 부분이다.

  헤스터 프린은 목사와 칠링워스의 삶이 파괴되는 것조차, 모두 그 책임을 자신의 귀책으로 돌린다. 


 나는 그래서 딤즈웨일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랑을 위해 헤스터 프린과 펄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작가는 펄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주홍글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P. 164.  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연히 달게 되는 거 아니야?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자식에게 들을 때 엄마가 받을 마음의 파동과 고통을 생각해 본다. 헤스터는 분명 딸에게 나중에 달아서는 안된다고 이야기 한다. 펄은 이야기 한다.


P.167. 그런데 왜 목사님은 엄마처럼 가슴위에 달지 않았지?


펄의 질문처럼 나는 딤즈웨일에게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은 한번이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펄을 위해 남자로서, 아빠의 존재로서 살아갈 수 없었나요? 사랑할 수 없었나요? 당신이 말하는 씻을 수 없는 고통 뒤 찾아온 회개와 고백은 혹시 성직자로서 당신 자신만을 위한 구원의 길은 아니었나요? 세상을 향한 헤스터의 외침을 다시 한 번 당신이 경청했으면 좋겠습니다.”


p. 95. 사실상 펄은 애정의 대상인 동시에 죄업의 상징이기도 했다.

p. 104. 이 아이가 내 주홍글자란걸 모르시겠습니까?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 주홍글자가 백만 배나 더 큰 힘으로 나를 벌주는 것입니다.


딤즈웨일의 마지막 선택도 사랑하는 연인과 딸을 위함이라기 보다는 자기구원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였나 의문을 갖게 된다.



3. 복수는 나의 것 칠링워스

 

 앞서 살펴본데로 헤스터 프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귀결짓고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악마로 변해가는 칠링워스를 향해 충고한다.


p.156

그 미움을 씻어대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나요?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자신을 위해서 말 이예요.


그렇다. 칠링워스는 헤스터 프린의 말대로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멈추었어야 했다. 누군가를 저주하며 살아간다는 것, 타인의 고통을 즐기며 자신의 삶을 쏟아 붓는 것만큼 끔찍한 삶은 없을 것이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패자만이 존재하는 것임을 우리는 인류사를 통해 확인해 왔다. 개인의 삶 또한 그러하다.

물론 칠링워스의 입장을 되돌아보면 그의 복수극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이라 생각하고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 한참 만에 만난 아내는 다른 이를 사랑하고 있고 그의 아이까지 키우며 그 남자를 끝까지 보호한다’ 이것은 남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분노가 타올랐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잔인한 복수를 시작했고 무너져 가는 딤즈데일을 지켜보며 마침내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저주와 미움의 대상이 없어져버리자 그의 삶도 함께 끝나버린다.


p. 229

온몸의 힘이-생명력이나 지력이 한꺼번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중략)... 이 불행한 사나이는 복수를 위해 상대를 궁지로 몰고 빈틈없이 실행하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삼았다. 따라서 복수가 완전한 승리로 끝나 사악한 목표를 지탱할 재료가 사라져 버리자- 즉 이 세상에서 악마 같은 짓을 계속 할수 없게 되자 이 인간성을 잃은 사나이에게 남은 일은 주인인 악마가 일거리를 장만해 주고 그에 따른 보수를 지불해 주는 지옥으로 가는 일뿐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애증이란 두 가지 격정이 본질적으로 동일해서 영혼의 세계로 가면 목사와 의사가 지상의 증오나 반감이 만족스러운 애정으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상에 살고 있는 나는 칠링워스처럼 살고 싶지 않다. 살다보면 누군가로 인해 내 마음의 평정이 깨지고 분노가 나를 집어 삼킬 때가 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정말 그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 인생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고난과 시련이 찾아올 때 자신의 삶을 어떻게 채워나가고 어떻게 마무리 할지는 모두 본인들의 선택이고 몫이다. 잘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다시 한번 지우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을 지금 만들어 가는 것이 소중한 나를 위한 가장 현명한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죽음도 함께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삶의 일부라도 칠링워스나 딤즈데일처럼 살아왔다면, 이제는 사랑을 몸소 실천한 헤즈터 프린처럼 오늘과 내일을 살고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 바닷가의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며 책임을 다하는 헤스터 프린의 삶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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