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2(습관방) - 자유서평 기록들

<3차> 내면의 나를 만나다. [야성의 부름_잭 런던]

이호영
2020-06-14
조회수 291


---------------------------------------------

《야성의 부름》은 알래스카의 클론다이크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들처럼 다윈의 진화론,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함께 니체의 위버멘쉬 사상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런던이 문학 작품 속에서 그리는 황량한 알래스카의 대자연은 문명의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이자,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과 맞서게 하면서 잠자는 가장 근본적인 본능을 일깨우고 불멸에의 동경으로 이끄는 매혹적인 도전의 대상이었다. 《야성의 부름》은 바로 그런 알래스카에서 ‘벅’이라는 개가 겪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냉정한 시선으로 생생히 그리는 가운데, 고양된 야성과 반항을 찬양한다.

따뜻한 남쪽 지방의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 속에서 문명에 길들여진 채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고 살던 벅은 어느 날 갑자기 북쪽 땅 알래스카의 썰매 개로 팔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빨간 스웨터 차림 사나이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얻어맞고, 야생 개들의 목숨을 건 사투를 목격하고는 그곳은 법과 질서와 도덕과 윤리 등 기존의 문명의 가치가 통하지 않고 선악의 구분이 없는, 오로지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차츰 그러한 법칙을 내면화하면서 야성에 눈뜬다. 그는 다양한 개들과 함께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썰매를 끌었고 그러는 동안 동료 개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추위와 맞서며 생존하는 방법, 싸움에서 승리하고 우두머리가 되는 방법을 터득한다. 런던은 알래스카의 거친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문명의 옷을 벗고 본능에 눈을 떠가는 개들의 시각에서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그 과정을 그려낸다.《야성의 부름》은 개들의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이끄는 각각의 개들은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그 개들은 거친 바다 위에 떠 있는 ‘고스트’호의 선원들처럼, 설원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을 벌인다. 그런 투쟁 속에서도 죽어가면서까지 썰매를 끌려는 데이브의 가련한 모습과 저마다 썰매를 끄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혼신을 다해 썰매를 끄는 개들의 모습에서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벅의 야성 본능과 무한한 자유에의 동경은 그 숭고함을 넘어선다. 벅은 동료 개들과 달리 썰매 개로서의 삶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반항하지 않고 동료들처럼 썰매 개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동료들처럼 얼음이 녹은 강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결국 벅은 썰매 장비를 벗어버린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손톤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그의 곁을 떠나 핏속에 흐르는 원시 야생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숲에서 들려오는 야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주변에서 생동감이 넘치는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손톤의 죽음과 함께 인간 세계, 문명과 완전히 절연하고, 원시 세계의 야성의 존재가 된다. 그는 인간은 물론 늑대들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한다. 이미 그는 문명의 윤리와 도덕으로 판단할 수 없는, 그 누구도 구속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문명의 옷을 벗어버리고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알래스카의 혹독한 환경을 극복하는, 문명에 길들여진 개는 물론이고 유전으로 내려온 늑대조차 극복하고 넘어서는 유령 개로 변신한 것이다. 아마 런던은 위버멘쉬를 동경하며 벅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인간형, ‘위버멘쉬’적인 인간형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스펜서의 사상을 신봉한 런던으로서는 니체의 개념과는 무관하게 위버멘쉬 이상의 초월적 존재, 초인(superman)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


[ 숨겨진 나와의 만남 ]


> 야성의 부름, 영화로 먼저 접하고 진한 감동과 가슴속에 울리는 무언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원작인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 책까지 단숨에 읽게 되었다. 

알래스카 금광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벅의 성장(?) 스토리다. 마치,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 대한 이야기처럼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벅은 사나이를 향해 열두 번이나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날아든 몽둥이에 가차 없이 얻어맞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한 번은 몹시 심하게 얻어맞고 쓰려졌는데, 다시 덤벼들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찔했다"


> 매일,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이다.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라 정신적인 타격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벅이 느낀 감정과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현실에 부딪치면서 이리저리 헤메이는 나도 구타를 당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리 승산이 없는 상황일지라도 싸움에서 도망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빨간 스웨터 사나이의 몽둥이가 그에게 더욱더 근본적이고 원시적인 규범을 소생시켜주었다. 그가 예전처럼 문명 세계에 있었다면 도덕적인 문제에 때문에, 기꺼이 채찍에 맞아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도덕적 문제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모면할 줄 알았다"


> 벅은 몽둥이질하는 스웨터 남성으로부터, 

   나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근본적이고 원시적인       

   규범을 배우고, 그것이 당연하고 진리라 생각하며 지내고 있는걸 지도 모른다. 과연 무엇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벅에게 길잡이 개의 지위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이 자부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벅은 벅대로 자신이 길잡이 개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면서 그 자격에 자부심을 가졌다."


>우리 모두는 하나씩의 개똥철학을 갖고 살아간다.

   개인만의 철학은 사용하는 언어, 사고,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되고 결국은 자부심까지 느끼게 된다. 이런 점에서 자부심이란건 

 '한 사람의 존재성'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썰매가 멈출 때면, 그들은 죽은 듯이 그대로 길바닥에 쓰러졌다. 금방이라도 생명의 불꽃이 꺼질 것만 같았다. 몽둥이나 채찍이 날아들면, 그 불꽃은 가냘프게 타올랐고 그제야 그들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는 휘청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고통'이라는 개념은 '즐거움','행복'의 이면에 있는 것일까?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는 행복이란 단어가 존재할까??

고통을 느낄수 있기에 행복이란 감점을 느낄수 있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고통', '시련'에 직면할 경우가 있다.

이런 문제를 초월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픔을 통해서 성장했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고통과 시련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 바로 앞에서 나타나는 감정이라고 알게 되면 '고통'은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수도있고, 다음 상황에서 맛 볼 '달콤함'을 즐기기 위한 사전 준비활동이라 가볍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중요성을 크게 부여 할수록 문제의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일어난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문제 이후에 펼쳐질 긍정적인 상황을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의무감이나 사업상 편의 때문에 개를 돌보지만, 그는 본래 천성적인 성품이 그런지 개들을 친자식이라도 되는 양 애지중지 돌보았다. 그는 정다운 인사와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는데, 앉아서 개들과 오랜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개들의 낙이자 그의 낙이기도 했다"


"숲속을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달렸다. 이윽고 해가 점점 높이 솟아오르고 기온이 따뜻해졌다. 벅은 날아갈 듯 기뻣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그미지의 소리에 응하여, 숲의 형제와 나란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 [야성의 부름]은 그 동안 잊고 살았던 '내면의 나'와 대화의 시간을 갖기에 충분했으며, 벅이 마주한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통해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알려줬다. 또 내가 처한 환경속에 원초적인 규범에 굴복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야성의 부름에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20.6.14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