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2(습관방) - 자유서평 기록들

<6차> 투박하지만 상냥한 레시피

김태연
2020-07-28
조회수 70

에세이 수업의 읽기 과제로 이 책을 접했다. 읽고 나니 이 책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내용도 좋고 문장도 좋고 정서도 좋다. 매우 좋다.

이 책은 암 투병 중인 아내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남긴 기록을 엮었다.
할 줄 아는 요리라곤 라면 뿐이었던 저자는 아내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능숙한 부엌살림꾼이 되었다.
레시피를 기억하려고 페이스북에 기록하던 내용을 엮어 책이 되었단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 글을 쓴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아내를 간호하면서 힘든 하루하루를 누구에겐가 털어놓고 싶었다.
낯선 부엌일을 시작하면서 배운 것들을 적어두고 싶었다.
그리고 암 투병이라는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드물게 찾아오는 짧은 기쁨을 길게 늘이고 싶었다.
아무리 슬픈 이야기라도 글로 쓰면 위로가 되었다. (p.13)

저자가 편집인이 아내에게 포스팅 몇 개를 보여주었을 때, 아픈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글이 좋다. 절제되어 있고 우아하다.
슬픔은 그림자처럼 곳곳에 스며들어 숨어 있지만 독자들에게 들키고 싶어하고,
그 슬플은 기쁨을 준비하네.
슬픈 이야기지만 독자들이 읽으면 행복할 거야. (p.14)

아픈 와중에 자신에 대한 소재로 쓴 글을 이렇게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니.
만만치 않은 내공의 소유자가 아닐까 싶다.
이런 단단한 내공을 소유한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그 반달 정도 시간을 줄 테니까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줘.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살 건지 알고 싶어.
당신이 가장 잘 하는 일,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시작해.
이제 더이상 거칠 게 없을 테니까. 죽기 전에 당신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건지 분명한 그림을 보고 싶어.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죽을 수 있게 해줘. (p.17)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남편의 앞날을 걱정하는 단호한 아내와 지극한 정성으로 아내에게 먹일 음식을 고민해서 장만하는 남편.
역시 영화화 될 만하다.

책은 대부분 음식 레시피와 간략한 그 때의 상황, 저자의 느낌이 적혀있는 수많은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음식에 대한 표현에도 인생의 통찰이 담겨있고,
식재료에 대한 얘기에도 슬픔이 담겨있다.

따듯한 밥은 세상과 부대끼며 단련되지 못했기 때문에 여물지 않다. (p.29)

프라이팬에 올리고 중불에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굽는다.
껍질이 새까맣게 되도록 구우면 잘 익은 바나나 맛이 난다.
오늘 처음 해봤다. 그래야만 했으므로.
아내가 맛있게 먹었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p.48)

엄격한 식이요법은 간절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그리움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일 년 동안이나.
그리움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그리던 얼굴을 만나면 얼마나 행복할까. (p.67)

텔레비전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집안을 채우기 시작했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적막하다.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맴도는 낱말이 바뀐다. '맛있네......ㅋ' 달콤한 포도주도 좋다.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티슈를 한 장 톡 뽑아 눈물콧물을 훔치며. (p.211)

몸에 새겨진 절실한 마음이 지워도 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요즘은 몸의 기억이 마음을 자극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싫어했던 산책을 이제는 몸이 원한다.
아침 일곱시면 잠을 깨는 이유도 비슷하다.
아내의 아침을 위해, 올빼미처럼 살던 평생의 습관을 바꾸었다.
절실했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p.238)

맛있는 레시피와 좋은 문장과 애잔하거나 울컥하는 슬픔이 뒤섞여있는
근래 읽은 책 중에 최고로 손꼽고 싶은 책이다.
책이 너무 귀해서 감히 사견을 덧붙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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