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2(습관방) - 자유서평 기록들

<5차> 삶과 시의 합작품

김수진
2020-07-11
조회수 106

올드걸의 시집 은유 서해문집


나는 시를 읽지 않았다. 아니 읽지를 못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할 것이지 왜 그리 빙빙 돌려 이야기를 할까 하면서 말이다. <올드걸의 시집>은 온라인 독서모임에서 방장님이 5권이나 사서 선물한다는 얘기에 책 사기가 취미인 나는 ‘어머 이건 사야해’하고 머스트 해브 아이템인 것 같아 구입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시를 읽는다는 것의 의미와 시를 읽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고 나도 시가 읽고 싶어졌다.

이 책은 2008년부터 쓴 은유 작가의 블로그에 실린 글을 2012년 첫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한 책이다. 절판되어 중고 가격으로 두 세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다가 5년 만에 다시 복간되었다.


p20

이 책은 단순하게 서른을 지나 마흔에 들어선 한 여성의 이야기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 챙겨 주고픈 구닥다리 모성관의 소유자이자, 문득 일상을 전면 중지하고 홀연한 떠남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시때때로 아름다운 언어에 익사 당하고 싶은 문자중독자이고, 밥벌이용 글을 써야 하는 문필하청업자이며, 사람 만나 이야기하고 그 소소한 행복을 글로 쓰길 좋아하는 데이트 생활자인 나. 수많은 존재로 증식되는 나를 추스리느라 휘청거리며 살아온 날들을 담았다.

이보다 더 자기소개를 잘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제목에서 말한 올드걸의 의미가 궁금했다. 작가는 올드걸이란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 주체’라고 정의한다.


또, 은유 작가는 왜 시를 읽는지도 궁금했다.

p18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 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이다.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 줬다.

시 한 편을 읽고 사유하여 차오르는 말들을 블로그에 올린 글이 차곡차곡 48편이 모여 이 책 <올드걸의 시집>이 된 것이다. 책은 3가지 구성으로 나뉘어 있다. 여자, 엄마, 작가. 가족과 결합된 시간과 사건이 많았던 시기에 쓴 글이라 동거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으로 인간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한 여자의 분투, 수없이 무너졌던 실패의 기록’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여러 권의 책을 내고 글쓰기가 직업인 작가가 느끼는 글쓰기에 관한 태도가 궁금했다.


p207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듯 날마다 원고 찍어 내던 때가 있었다. 재봉틀 드르륵 박고(문장을 쓰고) 단추 달고(제목 달고) 끝도 없이 나오는 실밥 뜯고(교정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훌쩍 저물었다.

글쓰기는 기능적인 일이기도 하면서 어쨌든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니, 늘 글쓰기가 힘들고 늘지 않는 글에 좌절하는 내게 위안과 실망을 동시에 안겨준다. 일상생활의 사유와 깨달음은 많은 울림을 주었다.


p71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 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p82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p104 유목은 한국에서 유럽으로 여행 가는 게 아니라, 자기로부터 떠나는 능력이다. 나의 정체성은 다른 내가 될 가능성이다.

p111 ‘늙음’ 그 존재의 무너짐을 ‘삶의 과제’로 의연히 받아들이고 싶다.

p199 머뭇거리는 생이여, 늦었다고 생각할 때 재빨리 악행을 저질러라.

p265 외로움이 자기보존에 기여하는 중차대한 감정이구나 생각한다. 인간을 사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야만에서 구제하는 요소고, 관심을 타자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겸손하게 만드는 동력으로서의 외로움.

p271 엄밀히 말하면 책에 대단한 구원의 메시지가 있어 그걸 익히고 행해서 삶이 나았다기보다, 책 읽느라 이 세계의 부스럭거림을 등질 수 있어서 나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해야 옳겠다.

평소 표현력이 부족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은유 작가가 대신 이야기를 해주는 듯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이 책의 부제처럼 상처받고 웅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권하고,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고 싶은 사람, 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 같은 사람,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싶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

은유 작가가 내 언니였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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